'환상게임'에 해당되는 글 1건
- 2006/09/13 환상게임 - 와타세 유우 (4)
'평범한 여주인공이 잘난 남자들 중 하나를 골라찍는 맛에 보는 만화'로도 일컬어지는 통칭 여성용 할렘물-_-; 『환상게임(원제 신기한 유희)』을 간만에 다시 좌르륵 몰아 읽었다. 많은 독자들은 단순한 소녀 판타지라고 하지만, 이 만화는 단순한 소녀 판타지가 아니다. 세상을 바꿀 정도로 강력한 소녀들의 판타지이다 (-_-;;)
『하늘은 붉은 강가』의 여주인공 스즈키 유리가 사랑하는 카일을 위해 이슈타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남자들의 이상을 충실히 이루어주는 방식으로 활약한 데 비해『환상게임』의 여주인공 미주는 먹을 것 밝히는 활발한 여자애라는 것 말고는 도움이 되는 게 없다. 스즈키 유리가 말을 달리고 칼을 휘두르며 남자 주인공을 적극적으로 도와준다면, 미주는 이리저리 넘어지고 휘청거리며 유성, 유유, 유익, 유장, 유귀, 유청, 유정 등등-_- 주작칠전사 남자 주인공들을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미주는 남자 주인공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데 데 그치지 않고 남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지키게 만들고, 자신을 욕망하게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어허, 이 어찌 바람직한 판타지가 아니냐=_=!)
이 만화의 전개는 비록 서투르지만, 캐릭터에 부여된 감정과 그것이 드러나고 교차하는 방식은 간간이 그 예리함을 드러낸다. 미주의 친구 진아가 미주를 미워하며 미주의 애인 유귀를 유혹하는 장면은, 여자친구들 사이에 이뤄지는 '우정이란 이름을 단' 애증의 교류를 잘 드러낸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지만-_-; 이 장면을 보고 진아가 유귀를 좋아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만화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을 놓쳐버린 것이다.
1부 후반부에서 더 적극적으로 드러나지만, 진아가 좋아했던 사람은 미주였다. 그녀가 유귀를 유혹했던 것은 미주가 자신보다도 유귀를 더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그에 복수하고자 한 행동이었다. 진아는 유귀를 좋아해서 미주에게 상처준 게 아니라 (자신보다 유귀를 더 좋아했던) 미주를 상처입히기 위해 유귀를 유혹했던 것이다. 여자애가 공부도 운동도 못 하는 평범한 소꿉친구 여자애를 좋아해서 집착할 리 없다고? 여자들은 오스칼님을 바라지 않는다. 미주와 진아의 관계는 비록 서투르게 그려지긴 했지만, 적어도 1부에서는 미주와 유기의 메인 연애담보다 훨씬 설득력 있었다.
주작의 무녀 미주에 대한 애증으로 청룡의 무녀가 된 진아는 유심의 계략에 빠져 청룡을 불러냈고, 뭇 나라들의 멸망을 가져왔으며, 청룡과 주작 칠전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그런 진아를 지켜낸 것은 진아의 곁에 있던 청룡칠전사가 아니라 주작의 무녀 미주였다. 진아가 미주에게 주작을 소환할 힘을 넘기고, 미주가 진아를 구원하는 1부 종반부는 그 판타지의 절정이었다. 두 소녀,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독자들의 판타지는 신을 소환하고 세상을 바꾼다.
기존 차원이동물의 소녀 판타지가 남자 주인공에게 동조하여 판타지 세상을 지켜내는 이야기였다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 미주는 1부 후반부에서 판타지 속 남자주인공 유귀를 자신의 세상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사랑을 쟁취한다. 그렇게 현실로 끌어낸 판타지인 만큼 언제까지고 온전하게 굴러가지는 않는다. 그 불안은 뒤이어 이어진 2부에서 '판타지 세계에서 현실로 소환된 주인공 유귀가 가지고 있던 판타지 세계에 대한 기억이 현실화됨으로써' 드러난다.
유귀는 판타지에서 현실로 끌어당겨졌지만, 본질은 판타지 세계의 사람이다. 유귀가 현실세계로 환생하기 전에 판타지 세계에 남겨두고 온 기억이 또다른 유귀를 만들어냄으로써, 현실로 끌어당겨진 유귀와 (오리지널)유귀의 기억을 가지고 다시 재생된 판타지 세계의 주인공 유귀- 이렇게 남자주인공은 둘로 나뉜다. 본질적으로 판타지 세계의 주인공이었던 만큼, 기억을 통해 재생된 판타지 세계의 유귀가 현실 세계에도 제대로 발 딛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급조된) 현실계의 유귀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다시 한 번 시작하자' 라고 말하는 판타지 세계의 유귀는 옛 기억을 모조리 그대로 가지고 있는 만큼, 과거 기억을 잃은 채 때때로 옛날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현실계의 유귀보다 더 매력적이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현실의 애인은 절대 흘러간 과거 환상속의 그대를 이기지 못한다. 설령 두 사람이 동일인물이라 해도. 아니, 그럴수록 더더욱!)
『환상 게임』2부의 종반부는 현실과 판타지의 모호한 경계를 정면으로 뚫고 들어가며 판타지의 남자 주인공을 완전히 현실에 정착시킨다. (현실과 판타지 어느 쪽에도 발붙이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있던 유귀는, 이제 판타지 세계에 머물러 있는 미주를 현실 세계로 이끌어내기까지 한다!) 동시에 그 행위는 남자 주인공을 통해 희미하게 연결되어 있던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완전히 단절하는 행위였다. 소녀는 이제 그 판타지를 현실로 이루어냄과 동시에 그것이 달고 있던 '판타지'라는 꼬리표를 떼어버린다. 소녀는 소년과의 관계를 통해 가정을 이루고 숭고한 사랑의 완성에 다다른다. 그 이상향은 '두 사람은 결혼해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동화 속 이야기의 완성형이자, 소녀의 사랑이 이룬 기적이다. 소녀의 확고한 의지로 맺어진 사랑은 관계를 통해 현실이 되고, 그 현실은 이상향이 됨으로써 이야기는 이뤄질 리 없는 기적을 이끌어낸다.
『환상게임 현무대전』이 그 쾌감을 주지 못하는 것은, 이 시리즈의 주인공 타키코가 미주처럼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세상을 행복하게 바꾸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환상 게임 본편에선 현무의 무녀 타키코가 현무에게 먹혀버렸다는 말이 나온다). 사실『환상 게임』이후 와타세 유우는 판타지가 현실을 바꿔내는 기적을 보여주지 않았다. 『천녀전설 아야』는 얼핏 해피엔딩으로 보이지만, 우리는 그 두 사람의 행복한 날들이 1년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더 이상 소녀들은 꿈꾸지 않는다. 꿈의 끝에 무엇이 있을 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절대그이』처럼, 환상은 언젠가 그 얄팍한 속내를 드러낼 환상일 뿐이라는 걸 깨달은 소녀들은 이제 무모하게 환상을 좇지 않는다. 옛날처럼 만화에 열중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환상 게임』조연들에 대한 잡담은 나중에;)

이올린에 북마크하기
Prev

Rss Feed